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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11월의 은유

청진기 11월의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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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1.0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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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 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질병에도 유행이 있고 은유가 존재한다.

흡연이 발암물질의 대표주자가 된지 오래고 비만은 질병의 종합 선물세트로 변질되었다. 둘 다 심각한 질병으로 분류돼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 감염 질환인 결핵은 코흐에 의해 결핵균이 발견되기 전까지 낭만적인 난치병으로 인식되었던 게 사실이다.

깡마른 몸, 창백한 얼굴, 불그스레한 뺨 등이 묘한 성적 매력으로 은유되었지만 선홍빛 각혈은 낭만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다. 불치의 대명사로 그래서 천형으로만 여겨졌던 암도 서서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은유는 에이즈를 도덕적 타락에 대한 천벌로 만들었다.

에이즈는 역병이며 인류의 적이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에볼라와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가 그 자리를 대신할 기세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을 통해 낙인을 찍으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그들의 집단적 상상력을 부추겨왔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뭔가 추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은유의 함정'이 있다고 했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며, 질병은 치료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계절에도 은유가 있을까.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수전 손택의 책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진료실 벽에 걸린 11월의 달력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들판의 곡식이 누렇게 익으면 의사의 얼굴도 누렇게 뜬다고 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시절 농번기가 되면 병원이 한가하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늦가을이기도 하고 초겨울이기도 한 11월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시월의 풍성함과 부산하고 화려한 세모 사이에서 자기만의 셈법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11월의 늦은 오후, 태양은 마지막 남은 열기를 헐벗은 나무에 쏟아 붓는다. 꽃과 열매를 모두 잃은 나무는 제 몸 속에 나이테 하나를 가만히 그려 넣는다. 한 해의 사연을 동그란 나이테 속에 차곡차곡 기록한다. 냉혹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이파리까지 모두 떨궈내고 오직 꼿꼿한 몸통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조금 더 자세히 11월을 들여다본다. 일요일을 제외하면 온통 검은 색이다. 그 흔한 공휴일 하나 없어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좋은 달이다. 하지만 숨을만한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세상의 품에 스며들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오십을 넘긴 중년에게 11월의 추위는 더욱 일찍 찾아든다.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의 심한 바람이 아니더라도 온 몸은 냉골이 되고 만다. 거리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데 뼛속에서 먼저 바람이 인다.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인생의 밑그림을 찾아 빛바랜 지도를 펼쳐든다. 11월에 유독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갑자기 찾아 온 추위 탓일까. 마음이 헛헛해진 나는 다른 날 보다 조금 일찍 병원 문을 나선다. 도로 양편에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이 가늘게 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버스 정류장에 빨간 우체통이 외롭게 서 있다. 스산한 바람이 방황하는 낙엽들을 보도블록에서 쓸어낸다.

편지지가 사라지고 책갈피가 사라지고 단풍잎도 사라졌지만 빨간 우체통만 보면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이런 나의 공허함을 달래줄 목소리를 찾아 카오디오를 켠다.

"건국대에서 발생한 집단 폐렴 환자가 사십 명을 넘었습니다. 전날에 이어 감염자의 검체를 채취해 예상되는 감염병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지만 명확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방역 당국은 감염성 병원체 외에도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에 노출돼 호흡기 증상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조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등뼈를 곧추 세우고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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