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있기에 오르고, 길이 있기에 걷는다
산이 있기에 오르고, 길이 있기에 걷는다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5.09.2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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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원장(경기도 광명시·김영준소아청소년과의원)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퍼스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종주기 <와일드>의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 그녀는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이르는 전장 4285㎞의 PCT 종주를 마치고 이렇게 되뇌였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그렇고 살면서 무수히 닥쳐오는 난관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서야 하는 삶의 과정또한 한계를 깊게 새긴다. 그러나 그 분명한 한계에 맞서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도전 앞에 우리 가슴은 먹먹해진다.

김영준 원장(경기 광명·김영준소아청소년과의원)에게 삶은 '견딤'이다. 사이토 마사키가 쓴 <세계 10대 트레일 걷기 여행>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차근차근 내재된 갈망을 채워간다.

그 속에서 견뎌낸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흥을 즐긴다. 네팔 쿰부 히말라야를 거쳐, 미국 서부의 '존 뮤어 트레일'(2013년), 스웨덴 '쿵스레덴'(2014년)을 지나 올해는 알프스 몽블랑 일원을 주유했다. 걸으면서 쌓인 역정은 글로 갈무리해 트레일이 낯선 이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주며 희망과 용기를 심는다. 그동안 <히말라야 걷기여행> <존 뮤어 걷기여행> 등 두 권의 책도 펴냈다.

"걷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며, 가장 원시적이며 본질적인 신앙고백"이라는 그가 딛는 걸음걸음에는 경건함이 묻어 있다.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과 자연속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땅 위에 그의 흔적을 오롯이 남긴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왔고, 또 어떤 길을 걸어갈까. 그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다.

 

▲ 미국 요세미티국립공원 하프돔 정상에 선 김영준 원장.

세계 10대 트레일을 매년 한 곳씩 섭렵하고 있다. 물론 물리적인 제약 때문에 전 코스를 종주하지는 못한다. 그에게 주어진 1주일은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실 존 뮤어 트레일(JMT)만해도 358㎞에 이릅니다. 종주에 최소 20일정도 소요됩니다. 개원의에게는 불가능한 시간입니다. 마음속에 아쉬움만 쌓여갔습니다. 그러다가 '꼭 전구간 종주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히 갖춰질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걸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녀온 후 책으로 종주기를 펴낸 JMT도 5일동안 100㎞ 남짓의 구간종주(요세미티국립공원~레즈 메도우) 여정이었습니다. 삶은 떠남을 통해 완성됩니다. 길 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걷다보면 때로는 감내할 수 없는 고통에 맞닥뜨린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아픔도 고통도 살아 있음을 노정하는 것이고 세상은 더 값진 것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가장 격정적이었던 순간은 해발 5550m 높이의 칼라파타르에 올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만나던 순간이었습니다. 새벽부터 걷기 시작해 고소증과 싸우며 헐떡이다가 마침내 정상에 서서 아침 햇살 반짝이는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던 그 때의 감동과 흥분은 도저히 말과 글로 옮길 수 없습니다. 존 뮤어 트래킹 중 요세미티공원의 하프 돔에 올라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볼 때도 정말 짜릿했습니다. 비가 갠 후 휘영청 달이 뜨고 그 달빛이 부서져 너울대던 캐세드랄 호수의 정취와 알프스에서 폭우를 뚫고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인 페레고개를 넘던 순간도 잊을 수 없습니다.

네팔 안나푸르나 서킷·프랑스 오트 루트·페루 잉카 트레일·뉴질랜드 밀포드 트랙·칠레 토레스 델파이네 서킷·에티오피아 시미엔 트레일·미국 애팔래치아 트레일·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일랜드 웨이·호주 그레이트 오션 워크·캐나다 웨스트 코스트 트레일·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 그는 이 길들을 놓지 못하고 있다.

 

"존 뮤어는 '산에서 보낸 하루가 몇 수레의 책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얻는 모든 것들을 우리 몸은 기억합니다. 머리가 몸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몸이 정신을 지배합니다. 몸으로 느낀 것들은 뇌에 깊이 각인됩니다. 직접 몸으로 겪고 체험한 것들이 산지식입니다. 자연은 진실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산에서는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순응하고 섭리에 따라야 합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거스르며 걷습니다. 힘이 들면 쉬고,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그리고 또 걷습니다. 우리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힘들어도 쉬지 않고 졸려도 자지 않습니다. 배가 불러도 계속 먹어댑니다. 순리를 어기며 삽니다. 그러면 꼭 병이 납니다."

무모한 도전이 되지 않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알아볼 일도 많다. 그 시간을 잠식하는 것은 역시 설레임이다.

"군불은 책이 지핍니다. 여행서를 읽으며 꿈을 키웁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7할이 떠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기대와 설렘과 흥분으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행복한 나날들이지요. 여행지가 결정되면 우선 날짜를 결정하고 항공권을 예매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최대한 정보를 모읍니다. 블로거들의 후기가 많은 도움이 되고, 구글맵을 통해 현장답사도 가능합니다. 세계 각지의 대중교통편도 구글맵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떠나기 위해, 견디기 위해 그의 몸은 쉬지 않는다. 등산·수영·마라톤에 여념없고 출퇴근은 자전거로 한다.

 

"주중에는 매일 아침 수영을 하고, 일요일에는 마라톤동호회에 나갑니다. 서울 목동 집에서 광명시 소하동 병원까지 자전거로 오가는데 40분 정도 걸립니다. 마라톤은 지금까지 18번 정도 풀코스를 완주했고, 도쿄마라톤에도 세 번 다녀왔습니다. 요즘 종아리 근육에 부상이 있어서 달리기를 못하는게 아쉬울뿐입니다. 보통 토요일 진료를 마친 후 가까운 산으로 야간 산행을 갑니다. 오후에 산에 오르기 시작해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노을이 지면서 붉게 물드는 황혼과 조우합니다. 일몰의 황홀경을 즐기다가 어둠이 내려앉으면 고즈넉한 산길을 하산합니다. 세속의 번잡함을 잊을 수 있는 명상의 시간입니다. 일요일에는 가평쪽 산에 자주 갑니다. 연인산·명지산·강씨봉·국망봉·축령산·서리산·주금산 등 명산이 많습니다. 연휴 때면 지리산·설악산·덕유산 등 큰 산에 가기도 합니다. 한 번씩 길게 걸으면 막힌 혈맥이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이 몰려옵니다."

'지금, 그 길을 걷자'는 그의 모토다. 망설임에서 벗어나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떠나게 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일단 발을 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서 후회하는 일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한다는 말도 여행에 있어서는 진리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은퇴 후에 여유롭게 여행을 즐긴다고 하지만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그 때 가서 후회합니다. 동네 뒷산부터 오르고 한강공원부터 걸으면 됩니다. 기본 체력만 갖춰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걷기여행입니다. 뛰지는 못해도 걸을 수는 있습니다."

그는 내년에는 대학생이 된 딸과 함께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를 걸을 예정이다. 12사도 바위로 유명한 호주 남부 해안을 따라 걷는 이름난 길이다. 딸과의 동행에 벌써부터 설레임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산이 있기에 오르고, 길이 있기에 걷는다.

"여행은 지구별 위에 내 발자취를 남기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세계와 연결되는 마법의 통로이고 살아있음의 증명입니다."

그가 오늘도 걷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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