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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통 의사의 '행복한 봉사 이야기'
몽골통 의사의 '행복한 봉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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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8.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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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태(몽골국립병원 교수/고려대 안암병원 장기이식센터 자문교수)

이틀 뒤 다시 몽골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까닭에 몽골통으로 소문난 박관태 교수와의 만남은 갑작스럽게 성사됐다.

몽골 현지에 세운 몽골아가페병원 건립 기초를 다지고 혹시 모를 도움이 될까 해서 탈모 관련 교육을 병행하기 위해 2주 정도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

의료봉사를 위해 고려의대 교수직까지 내려놓은 그는 매우 진중하면서도 유쾌한 사람이었다.

의대생 시절 절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료봉사의 삶을 선택했고, 이 선택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믿는 박관태 교수를 서울의 한 병원에서 만났다.


고대안암병원 이식혈관외과 분과장으로 소위 잘나가던 박관태 교수는 2년 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에 몽골행을 결심하게 된다. 고려의대 교수직을 내놓고, 몽골국립의대 교수로 지내기로 한 것이다.

"가장 잘 할 수 있을 때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마흔 다섯이 젊다면 젊은 나이고 많다면 많은 나이지요. 40대에 들어서면서 수술을 할 때 만족감과 자신감이 들었어요.

누군가는 조금 더 미뤄서 정년이 지난 후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조언했지만, 저는 전성기인 지금 나이에 떠나서 의료봉사 활동에 집중해보고 싶었습니다."

제3국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의 마음까지 돌보면서 매번 새로운 보람과 활력을 느꼈던 터다. 애초에 소문 난 몽골통이었기 때문에, 몽골국립대병원에 교수로 임용되는 일은 순조로웠다.

"월급 40만원 받겠다고 하는 일은 아니겠지요. 허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늘 재미있어요. 하물며 몽골 학생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더욱 힘이 납니다."

친구와의 약속이 함께하는 의료봉사

박관태 교수의 의료봉사에는 하릴없는 책임감이 따르는 셈인데, 바로 절친이었던 심재학 씨와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관태 교수는 의대생 시절 마음이 맞는 친구 심재학과 의료봉사를 다니자고 약속했다.

박 교수가 외과를, 그리고 심재학 씨가 내과를, 지금 박 교수의 아내가 산부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데는 의료봉사라는 대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9년 11월, 심재학은 암에 걸려 내 몫까지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게 됐다.

박 교수는 2001년부터 코이카와 손잡고 일하면서 심재학 기념 도서관까지 세웠고 몽골 차튼족 사람들을 위해 텐트 치고 복강경 수술을 진행하며 '복강경 수술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연차와 연후를 모두 사용해 일년에 4~5차례 몽골 등 세계 각국의 어려운 곳을 돌았고, 미국 학회 일정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아이티를 들렀다.

출장으로 카자흐스탄을 돌아보는 등 2008년 이후에는 평균 10회 정도 제3국을 다녀온 셈이다. 의료봉사 활동을 위해 팀을 꾸려간 횟수만도 100여 회에 달한다.

"아이티 지진 직후 긴급구호팀으로 고대 의료봉사팀의 부팀장으로 간 것이 인연이 돼 계속 아이티에 가게 됐는데 첫번째 방문 때 응급제왕절개 수술이 필요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제왕절개를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어 산부인과 전문의인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하면서 처음 아이를 받아보았거든요. 말 그대로 경이로운 경험이었어요!"

2005년 몽골 내 복강경 수술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파키스탄 선한사마리아 병원, 네팔 탄센병원, 캄보디아 헤브론 병원 등 10여 개국에 복강경 기기를 설치하고 수술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내에 들어와서 지낼 때는 몽골에 필요한 것, 준비해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2009년 안암으로 터를 옮기면서 더욱 조직적으로 큰 규모의 일을 해나갈 수 있었고, 재미와 보람은 지속성을 담보했다.

아이티만 일곱 번을 다녀왔고 심장병 어린이 수술도 수차례 진행했다. 미얀마 언청이 프로젝트를 시행한 지도 3년째.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네팔까지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박 교수는 이런 일들을 해나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들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라 강조했다.

"지난번 아이티에 갔을 때 '한국전쟁 때 너희가 우리나라를 도와줘서 지금 이만큼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너희를 도울 차례니 힘내고 일어서라'는 메시지를 전했더니 그곳 사람들이 감동해서 목놓아 울더군요. 의료봉사 활동은 매순간 새로운 감동이 일어나지요."

박관태 교수는 현재 의료선교 단체 GIC의 기획하는 의사로서 다양한 행사를 준비·진행하고 있다. 의사팀의 의료봉사와 함께 문화팀의 문화·마술·음악 등 여러 가지 네트워킹을 통해서 다양한 문화공연을 함께 펼쳐왔다.

"의료봉사의 꿈은 세계로 번지고 있어요.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의 어려운 곳을 돌아보는데 이건 시대적인 요구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의료봉사에도 기획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획은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되고 더 행복하고 능력 있는 의사로 만들어줍니다."

봉사의 새 패러다임 꿈꾸다

몽골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박 교수는 몽골에 장기이식팀을 구성해 직접 이식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세팅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자립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에 이식을 세팅을 해주었는데요. 마지막 쉼켄트라는 도시까지 치면 총 3도시에 장기이식 프로세스를 세팅한 셈이 됩니다. 지금은 몽골국립의대 사역과 함께 병원을 세우려고 하는데요. 혈액투석과 말기 암환자들의 호스피스가 가능한 병원이 몽골엔 없거든요.

10대의 투석 기계를 두고 있는데, 수익이 있어야지 병원 운영이 가능하잖아요.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모발 이식 관련 연수중입니다. 허허."

현지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원조 등의 단기적인 도움보다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싶었던 박관태 원장이 몽골에 세원진 호스피스·투석 전문병원 몽골 아가페 병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몽골국제병원은 후원을 받아서 세우긴 했지만,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오픈되어 있는 병원이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몽골은 말기 암환자나 투석 환자의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고 이식과 투석이 생소한데, 그래서 몽골국제병원은 투석과 호스피스를 병행한다.

"몽골 시티가 국립의대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진다면, 이 병원은 몽골 외곽 징키스칸 공항 근처에 세워져 있어 우리의 활동반경을 좀 더 넓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교수가 의료봉사 활동을 시작한 지 꼭 15년, 몽골의 국립 1병원 혹은 현지의 시설이 좋은 사립병원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비싸서 환자가 치료를 못 받거나, 뒷돈을 받는 등의 부패가 없어야 하는 전제하에 울란바타르 외곽에 의과대학과는 별도로 전문병원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보다 업그레이드 된 의료봉사 활동이자 의료봉사의 꽃이 바로 병원을 짓는 일이겠지요. GIC의 후원과 노력, 그밖에도 홍순철 교수님 등 같이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봉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는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라 말하는 박관태 교수 부부와 세 아이들이 몽골에서의 생활이 몹시 궁금했다. 박관태 교수는 빙긋 웃으며 어디서든지 어떻게든지 살아지게 마련이라 답했다.

"사표를 던질 때 고민이 많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의사들이 그리고 대한민국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몽골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냥, 한마디로 꽂힌 거죠. 몽골족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 재학이는 코이카로 먼저 간 2년 선배에게서 몽골에 대한 인포메이션을 많이 받아두고 있었죠.

저 역시 3년 동안 의료봉사 활동을 하면서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생겼고요. 봉사하는 팀원들 모두 피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고생을 하지만, 세상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겁니다."

1999년 친구가 죽던 해, 박 교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몽골을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활동은 이제 박관태표 의료봉사라는 개런티를 가지게 됐다.

박관태 교수는 훗날 남은 생에 이식 버스 2대를 잘 만들어 중앙아시아를 누비며 치료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버스 한쪽 벽면에는 물론 친구 심재학의 사진이 함께할 것이다. 언젠가는 닥터 심 메모리얼 호스피스 클리닉(심재학 기념병원)도 건립하고 싶다고도 했다.

막연히 슈바이처처럼 살겠다고 생각하다 운명처럼 같은 꿈을 꾸던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뤘고, 내 몫까지 도우라는 가장 소중한 친구의 유언까지 더해졌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말하며 웃음 짓는 박관태 교수.

"본질이 충족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고 그래서 나는 행복한 의사"라는 말이 깊은 울림으로 마음에 닿았다.

글·사진 보령제약 사보기자 정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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