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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당신과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까요?"
청진기 "당신과 내가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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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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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희 원장(·인천 서구·연세엄마손의원 ·매거진 <반창고> 발행인)
▲ 전진희 원장(·인천 서구·연세엄마손의원 ·매거진 <반창고> 발행인)

인간에게 질병은 좌절과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며 개선의 여지가 불확실한 슈퍼 갑이다.

질병은 그 원인과 치료를 100%의 확실성으로 진행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러므로 환자와 의사가 서로를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대한다면 질병이라는 슈퍼갑을 결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환자와 의사는 서로 동지가 돼야 질병의 '갑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환자와 의료진이 동지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시작점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이다.

의사들이 가진 대화 방식은 전문성을 가진 단어와 논리에 입각한 직선적인 화법이다. 이런 방식의 화법은 의사들의 직업적인 사고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질병에 지지 않고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급박한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수십 년을 교육 받으며 형성된 화법은 반드시 필요한 사고와 대화의 형태이다.

환자는 질병이라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주에 떨어진 미아처럼 미지의 세계에 방치된 것과 같은 심리 상태가 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종의 구속 상태처럼 느낀다. 이런 환자에게 대화는 간구의 수단이다. 그러나 의사와 환자가 같은 단어를 사용해 대화한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고 체계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서로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화해야 할 것인가?
"왜 약을 안 주는데?"
아침 오전 진료가 거의 마무리 될 때쯤 들어오신 분은 50대의 당뇨 환자였다.

그녀는 우리 병원을 내원해 진료를 받기 시작한지 몇 개월 정도 지난 재진 환자였다. 그동안 다른 의사의 진료실에서 추적 관찰을 하던 분으로 나에게는 처음 진료를 한 경우였다. 그녀가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 간단히 살펴본 진료 기록부는 어지러운 단어들로 빼곡했다.

'alocohol drinkg, complience 떨어짐. 약만 주기 원함. 대화시도 거부. 검사 받으려 하지 않음… 등등.'
그녀가 진료실에 들어오는 짧은 시간동안 나는 그녀와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생각했다.

"어머니, 저는 처음 뵙네요. 그동안 저희 병원을 다녀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첫 마디에 감사함을 담아 전하는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열기로 했다. 처음 만나는 여의사가 일어서서 인사를 건네니 그녀는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진료 의자에 앉았다.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이 동네에서 살기는 어떠세요? 새로운 곳이라 낯설지 않으세요? 어머니 미녀이신데요. 아버님은 건강하세요?"

낯선 의사가 묻는 질문에 그녀는 그동안 심심했는데 잘 됐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화중에 난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를 맡게 됐고 어눌한 말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머니, 술 드셨나봐요? 하루에 약주 얼마나 하세요?"
매일 서너 잔 이상의 소주를 먹는다는 그녀와 대화하며 나는 그녀의 습관을 바꾸기 위한 특별한 화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이제 저는 어머니께 약을 안 드릴 거예요. 전 어머니의 의사지, 약만 파는 사람이 아니에요. 술도 끊지 않고 약만 받아 가시면 안돼요. 제 말은 듣지 않고 약만 받아가서 술과 같이 드시면 몸은 더 망가질 거예요."

그렇게 이어진 그녀와 나의 실랑이는 십 여분이 이어졌다.

난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녀는 얼마 전 배우자와 사별하고 홀로 낮선 동네에서 살며 관심과 애정 어린 누군가의 잔소리가 그리운 상태인 듯 했다. 전화로 오고가는 자녀들과의 대화는 "잘 지내세요? 술은 그만 드세요. 몸에 안 좋잖아요. 알았어요. 바쁘니 이만 끊어요."

이런 정도의 무심한 대화였기에 그녀에게는 애정 어린 관심과 조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딸 같은 모습으로 대화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저 "금주하세요"라는 객관적인 단어로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의 단어와 말투가 필요했다. 어머니를 어르고 달래는 딸과 같은 나의 대화 방법으로 결국 그녀는 나를 '자신을 걱정해 주는 딸 같은 여의사'로 인식하게 됐다. 그녀는 나에게 금주를 약속하고는 처방전을 받아서 집으로 귀가했다.

음주로 인한 추후 관찰을 위해서 조만간 또 내원하기로 한 그녀는 정확하게 2주 후에 병원에 들렸다. 양손 가득 김밥을 사가지고 온 그녀는 내게 자랑하듯 술을 줄였다고 했다.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며 스스로 약속을 하고 그녀는 병원을 나섰다.

의사로서 전하는 단어와 객관적인 사실과 내용은 물론 지켜야 한다. 그러나 대화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듣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대화의 내용은 객관성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상대가 듣기에 친근하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자세로 대화한다면 환자에게 내용을 더 잘 전달하고 수용하도록 도울 수 있다. 더불어 이해의 오류로 인한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질 수 있다.

의료인과 환자는 서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처럼 느낄 수 있다. 언어의 다름을 이해하고 대화의 수준을 '상대'에게 맞춘다면 전하고자 하는 사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우며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환자와 의사는 질병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동지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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